2019년 4월 11일 목요일

팩트풀니스


"세계를 정말로 바꾸고 싶다면 누군가의 면상을 갈기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부터 이해해야 한다."


애자일 말고 다른 책좀 읽으라는 지인분의 말을 듣고 곧바로 구매!!!

언론 혹은 다른 다양한 채널을 통해 들어오는 정보들에 대해 우리는 이분적인 사고방식을 통해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리고 이 오류들은 세상을 전혀 다르게 바라보게 만들고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잘못 생각했던 것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이건 실현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다른 시선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언제든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를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좀 더 세상을 제대로 바라보자. 


인간의 뇌는 수백만 년간 진화를 거쳤고, 우리 몸에 밴 본능은 우리 조상이 소집단을 이뤄 수렵과 채집을 하며 생존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인간의 뇌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속단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 덕분에 즉각적인 위험을 피하기도 한다. 우리는 남의 이야기와 극적인 이야기에 흥미를 느끼고, 그것이 뉴스와 유용한 정보의 유일한 원천이 되기도 한다.

우물 안에 계속 갇혀 살기보다 올바르게 사는 데 관심이 있다면, 세계관을 흔쾌히 바꿀 마음이 있다면, 본능적 반응 대신 비판적 사고를 할 준비가 되었다면, 겸손함과 호기심을 갖고 기꺼이 감탄하고자 한다면 이 책을 계속 읽어보기 바란다.

“전 세계 인구 중 몇 퍼센트가 저소득 국가에 살까?”
그러자 다수가 50% 이상이라고 대답했고, 그 추정치 평균은 59%였다. 
정답은 9%다. 전 세계에서 겨우 9%가 저소득 국가에 산다. 그런 나라에서도 사람의 삶이 생각만큼 그렇게 비참하지 않다.

간극 본능
내 생각에 인간에게는 이분법적 사고를 추구하는 강력하고 극적인 본능이 있는 것 같다. 어떤 대상을 뚜렷이 구별되는 두 집단으로 나누려는 본능인데, 두 집단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라고는 실체 없는 간극일뿐이다. 우리는 이분법을 좋아한다. 좋은 것과 나쁜 것, 영웅과 악인, 우리 나라와 다른 나라, 세상을 뚜렷이 구별되는 양측으로 나누는 것은 간단하고 직관적일 뿐 아니라, 충돌을 암시한다는 점에서 극적이다. 우리는 별다른 생각 없이 항상 그런 구분을 한다.

부정 본능을 억제하려면 나쁜 소식을 예상하라. 
나아지지만 나쁘다 : 현 수준과 변화의 방향을 구별하는 연습을 하라. 상황은 나아지는 동시에 나쁠 수도 있다는 확신을 가져라.
좋은 소식은 뉴스가 안 된다 : 좋은 소식은 거의 보도하지 않는다. 그래서 뉴스는 거의 항상 나쁜 소식이다.
점진적 개선은 뉴스가 안 된다. : 점진적으로 개선되는 중에 주기적으로 작은 문제가 나타난다면, 전반 적 개선보다 그 문제를 주목할 가능성이 높다.

수십 억 인구가 극빈층을 탈출하면서 이들 대부분이 아이를 적게 낳기로 결심했다. 가족 단위의 소규모 농사를 지으면서 아동 노동력을 얻기 위한 대가족이 필요 없게 되었다. 아동 사망에 대비해 아이를 많이 낳은 필요도 없어졌다. 여성과 남성이 교육받기 시작하면서 아이들을 잘 가르치고 잘 먹이고 싶은 욕구도 생겼다.

직선 본능을 억제하려면 세상에는 다양한 곡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직선이라고 단정하지 마라 : 많은 추세가 직선보다는 S자 곡선이나 미끄럼틀 곡선, 낙타 혹 곡선, 2배 증가 곡선으로 진행된다. 생후 6개월까지의 성장 속도를 이후에도 계속 유지하는 아이는 없으며, 그러리라 예상하는 부모도 없다.

나는 자연재해(총사망자의 0.1), 항공기 사고(0.001), 살인(0.7), 방사성물질 유출(0), 테러(0.05) 같은 끔찍한 사건들은 여전히 언론의 집중적 관심을 받는다. 사망률이 낮더라도 당연히 더 줄이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수치는 공포 본능이 우리의 관심을 얼마나 왜곡하는지 잘 보여준다. 우리가 정말로 두려워해야 하는 것이 무엇이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해하려면 공포 본능을 누르고 실제 사망자 수를 따져봐야 한다. 
‘공포’와 ‘위험’은 엄연히 다르다. 무서운 것은 위험해 보인다. 그러나 정말로 위험한 것에 진짜 위험 요소가 있다.

마침내 그가 집에 돌아오자 토론이 이어졌다. 친구가 주장했다. “병원에 오는 모든 환자한테 할 수 있는 건 다해야 해.” 
내가 대꾸했다. “그렇지 않아. 내 시간과 자원을 이곳에 찾아온 사람을 살리는 데 모두 소진하는 건 비윤리적이야. 내가 병원 밖 서비스를 개선하면 더 많은 아이를 살릴 수 있으니까. 이 지방 ‘모든’ 아이의 죽음이 다 내 책임이라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죽어가는 아이들도 내 눈앞에서 죽어가는 아이들과 똑같아."

1, 2단계 나라에서 아이들의 목숨을 살리는 것은 의사나 병실침대가 아니다. 병실 침대와 의사는 수를 세기 쉽고 정치인은 병원 개원식을 무척 좋아하지만, 아이들의 생존율을 높이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병원 밖에서 해당 지역 간호사, 산파, 교육받은 부모 등이 예방 조치를 취하는 것이다. 특히 엄마의 역할이 중요하다. 데이터를 보면 세계적으로 아동 생존율 증가의 절반은 엄마들의 탈문맹에서 나왔다.

중국과의 전쟁은 싸움과 휴전을 반복하며 2000년 동안 지속되었다. 프랑스가 점령한 기간은 200년이었다. 대미항전은 고작 20년 지속되었다. 비의 크기는 그런 기간을 완벽하게 반영했다. 나는 여러개의 비를 비교한 뒤에야 비로소 지금 베트남 사람들에게 베트남전쟁은 상대적으로 의미가 작다는 걸 이해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밖에’ 있는 온갖 위험을 걱정한다. 자연재해로 많은 사람이 죽고, 질병이 퍼지고, 비행기가 추락한다. 이 모든 일이 밖에서 수평선 저 너머에서 늘 일어난다. 조금 이상하지 않은가? 그런 끔찍한 사건은 우리가 사는 안전한 장소인 ‘여기’서는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저 밖에서는 날마다 일어나는 것만 같다. 하지만 기억하라. ‘저 밖’은 무수히 많은 장소의 합이고 우리는 한곳에 산다.

우리는 비교 불가능한 여러 집단을 일반화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하며, 우리 논리에 숨은 광범위한 일반화를 찾아내려고 또 노력해야 한다.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새로운 증거나 나오면 언제든지 예전의 단정에 의문을 제기하고, 그것을 재평가해 우리가 틀렸다는 사실을 기꺼이 시인해야 한다.


개인이나 집단을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해 비난할 생각을 버려야 한다. 나쁜 사람을 찾아내면 더 이상 고민하지 않는다. 그러나 문제는 거의 항상 그보다 훨씬 복잡하다. 여러 원인이 얽힌 시스템이 문제일 때가 대부분이다. 세계를 정말로 바꾸고 싶다면 누군가의 면상을 갈기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부터 이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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