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2월 4일 월요일

사피엔스 (by 유발 하라리)

한마디로 이런 책을 왜 이제야 보게 되었을까, 그리고 이제라도 이런 책을 볼 수 있어서 다행이다 라는 생각이 들게 만들어 준 책입니다.

사실 작가의 신작인 '호모 데우스'가 지난 달 출간되어 보려던 차에 그 전편인 '사피엔스'를 보고 보는 게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부랴부랴 읽게 되었습니다. 책이 두껍지만 너무 재밌어서 3일만에 다 읽게 되네요.

이미 유명한 책이니 자세한 설명은 줄이더라도,

인류의 기원, 즉 시작점에는 보잘 것 없는 연약한 동물 중 하나였던 호모 사피엔스(=현 인류)가 이제 세계를 주도하고 지배하고 정복하게 되어 온 모든 과정과 그로 인해 나타나는 사회, 문화, 경제, 정치 전 분야의 영향들에 대해 광범위하고도 깊이 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가장 흥미로운 표현은 이 모든 것이 '사피엔스의 상상의 산물'이라는 것 입니다. 국가라는 개념도, 신용이라는 개념도, 정치라는 개념도 모두 실제하지 않는 어떤 가상의 현상을 인간의 상상을 통해 구현해 낸 산물이라는 점인데 이러한 상상이 세계를 움직이는 엔진이자 방정식이 된 것을 보면 과연 사피엔스가 세상을 주도하고 있다는 점이 실감납니다.

진화론에 입각하고 있고 창조론을 일련의 상상으로 치부하고 있기에 종교에 따라 거부감이 드는 부분도 있겠으나 그러한 관점보다는 작가가 bird view에 가깝게 인간사를 저 위에 올라가서 넓게 내려다 본 시도 자체가 우리의 생각에 큰 자극을 주고 환기의 기회를 주는 것 같습니다.

인상적이었던 문구 몇개를 붙입니다.

수천 년의 역사를 오늘날의 관점에서 판단하는 것은 잘못이다.

역사를 통틀어 사람들이 오류를 범하는 이유는 동일한 이유에서였다. 사람들은 자신의 결정이 가져올 결과를 전체적으로 파악하는 능력을 갖고 있지 않았다.

진화적 성공과 개체의 고통 간의 괴리는 우리가 농업혁명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교훈일 것이다. 소나 양, 사피엔스처럼 각자 복잡한 기분과 감정을 지닌 동물의 경우, 진화적 성공이란 것이 개체의 경험에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지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 앞으로도 우리는 우리 종이 집단적으로 힘을 키우고 외견상 성공을 구가한 것이 개개인의 큰 고통과 나란히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하게 될 것이다.  

근대 후기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90%는 아침마다 일어나 구슬 같은 땀을 흘리며 땅을 가는 농부였다. 그들의 잉여 생산이 소수의 엘리트를 먹여 살렸다. 왕, 정부 관료, 병사, 사제, 예술가, 사색가...... 역사책에 기록된 것은 이들 엘리트의 이야기다. 역사란 다른 모든 사람이 땅을 갈고 물을 운반하는 동안 극소수의 사람이 해온 무엇이다.

협력'이란 말은 매우 이타적으로 들리지만 항상 자발적인 것은 아니었으며 평등주의적인 경우는 드물었다. 인간의 협력망은 대부분 압제와 착취에 적합하도록 맞춰져 있었다. 급성장하는 협력망에 돈을 댄 것은 농부들의 소중한 잉여식량이었다.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사상 또한 신화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인간이 서로 평등하다는 것인가? 인간의 상상력을 벗어난 어딘가에 우리가 진정으로 평등한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세계가 있단 말인가? 모든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평등한가? 

상상의 질서란 사악한 음모도 무의미한 환상도 아니다. 그보다는 아주 많은 사람들이 효과적으로 협력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렇지만 함무라비도 자신의 위계질서 원리를 동일한 논리로 옹호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만큼은 기억해두자. 가령 이렇게 말이다. 

"나는 귀족, 평민, 노예가 날 때부터 다른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만일 그들이 다르다고 믿으면, 우리는 더 안정적이고 번영한 사회를 창조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대 그들'이라는 이분법적 진화적 구분을 처음으로 어찌어찌 초월했고 인류의 잠재적 통일을 내다볼 수 있었던 사람들은 상인, 정복자, 예언자 들이었다. 상인들에게는 세계 전체가 단일시장이었으며 모든 인간은 잠재적 고객이었다. 이들은 어디에서나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경제질서를 세우고 싶어 했다. 정복자들에게는 세계 전체가 단일 제국이었고 모든 인간은 잠재적 신민이었다. 예언자들에게는 온 세계에 진리는 하나뿐이었으며 모든 인간은 잠재적 신자였다. 이들 역시 어디에서나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질서를 세우려고 노력했다. 

우리는 약자가 이기는 것을 보고 싶어 한다. 하지만 역사에 정의란 없다. 과거에 존재했던 문화 대부분은 늦든 이르든 어떤 무자비한 제국의 군대에 희생되었고, 제국은 이들 문화를 망각 속에 밀어 넣었다. 제국도 마침내 무너지지만, 대체로 풍성하고 지속적인 유산을 남긴다. 21세기를 사는 거의 모든 사람은 어디가 되었든 제국의 후예이다. 

그러면 왜 역사를 연구하는가? 물리학이나 경제학과 달리, 역사는 정확한 예측을 하는 수단이 아니다. 역사를 연구하는 것은 미래를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서다. 우리의 현재 상황이 자연스러운 것도 필연적인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다. 그 결과 우리 앞에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많은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

역사가 인류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작동한다는 증거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그런 이익을 측정할 객관적 척도가 없기 때문이다. 문화에 따라 무엇이 선인지에 대한 정의가 달라지는데, 어느 쪽이 옳은지를 판단할 객관적인 척도는 우리에게 없다. 물론 늘 승자는 자기네 정의가 옳다고 주장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왜 승자의 말을 믿어야 하는가?

'지식'의 진정한 시금석은 그것이 진리인가 아닌가가 아니라, 그것이 우리에게 힘을 주느냐의 여부다. 
만일 신용이 그토록 놀라운 것이라면 어째서 아무도 좀 더 일찍 그것을 생각해내지 못했을까? 물론 과거에게 생각한 사람이 있었다. 이런저런 종류의 신용 거래는 인류의 모든 문화권에 존재했으며, 그 기원은 최소한 고대 수메르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옛 시대의 문제점은 아무도 그런 아이디어를 떠올리지 못했다거나 활용할 방법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신용을 크게 확장하려는 경우가 드물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미래가 현재보다 나을 것이라고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보통 자기 시대보다 과거가 더 좋았으며 미래는 현재보다 더 나쁘거나 기껏해야 지금과 같을 것이라고 믿었다.
생태계 파괴는 자원 희소성과 같은 문제가 아니다. 인류가 사용할 수 있는 자원은 계속해서 늘고 있으며 앞으로도 이 추세는 계속될 가능성이 크다. 자원의 희소성을 말하는 종말론적 예언가들이 아마도 헛짚은 것으로 보이는 이유다. 이와 반대로 생태계 파괴에 대한 두려움은 근거가 너무 확실하다. 미래의 사피엔스는 온갖 새로운 원자재와 에너지원의 보고를 손에 넣되 이와 함께 겨우 남아 있는 자연 서식지를 파괴하고 대부분의 종을 멸종시킬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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